고대 인도의 역사 요약 1
'인더스 문명 ~ 베다 시대'
BC2500~BC1500년경 : 인더스 문명
▶ 기원전 2500년부터 1000년 이상을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수많은 도시들을 건설한 고대 인더스 시대
고대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장본인은 드라비다인이다. 인더스강을 따라 농사를 짓고 마을을 만들어 도시가 발전되었다. 인더스 문명은 땅과 물을 주신으로 섬기고 특히, 땅을 대지의 여신으로 숭배하고 찬양하였다. 모든 곡식이나 생명들이 대지로부터 자라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사에 필요한 물도 신성시했지만 때로는 홍수를 일으켜 재앙을 불러오기도 해서 숭배와 두려움을 동시에 가졌다. 물에는 오염된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물로 씻는 의식을 치렀다.
현재 인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종교의식으로 갠지스강에서 물로 씻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도시가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많은 직업이 생겨났다. 기술직은 장인들과 상업, 무역업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청동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와 토기를 만드는 도공, 장신구를 제작하는 보석공이 존재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제품의 질이 좋아지자 물건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갈수록 수공업이 발달하여 외부와의 교역도 활발해졌다.
상인들은 배에 짐을 가득 싣고서 도시끼리 거래를 시작했고, 저 멀리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과도 교역을 했는데, 장사나 거래를 할 때에 쓰여졌던 작은 사각형 도장(인장) 같은 것을 사용한 흔적이 여기저기 기록이나 유물 등에 나타난다.
인더스 문명의 문자가 기본이 그림문자로, 도장에도 여러 가지 기호나 그림이 새겨져 있지만 현재로서는 해석이 어렵다. 이런 유물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에서도 발견되어 이 두 문명이 오래전부터 서로 교역을 해왔는지 추측 가능하다.
인더스 문명에는 2500개에 달하는 수 많은 도시 유적들이 넓은 지역에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이다.
모헨조다로는 1922년 처음 발견되어 도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인더스 문명의 수도로 언급된다. 그 당시 모헨조다로의 인구가 무려 3만~5만 정도로, 당시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수로 추정한다. 도시 내부에는 밀과 보리를 저장하는 거대한 곡물창고가 있었고 특히, 물을 잘 이용한 수리시설이 있었다. 집집마다 우물과 상·하수도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마을에는 수영장만 한 큰 공중목욕탕도 있었다. 몸을 깨끗하게 해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한 제례 의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우수했던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 갑자기 사라진다. 당시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더스강 주변에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고 거대한 홍수로 큰 피해가 있었다. 이러한 예측하기 어려운 홍수와 가뭄들의 자연재해로 인구가 감소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자연스럽게 인더스 문명이 사라졌다고 해석하며, 또 다른 원인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리아인이 인더스강 주변으로 이동하면서 힘으로 정복하여 사라졌다고 추측한다.
BC1500~BC500년경 : 베다 시대
▶ 기원전 1500년경 철기 문화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와 인더스 지역을 통치한 베다 시대
인더스 문명이 사라진 후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500년에 걸쳐 중앙아시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아리아인들이 철제 무기와 차크라라고 하는 강력한 전차를 타고 건너와 인더스 지역을 힘으로 정복하게 된다.
소수의 아리아인은 다수의 드라비다인과 다양한 원주민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엄격한 신분제인 카스트제도와 브라만교를 만들어서 더욱어 지배력을 강화한다. 브라만교의 경전 이름을 따서 이 시기를 베다시대라고 부른다.
* 카스트 제도 :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도에 들어온 이후에 만들어진 용어로 포르투칼어 '가문', '혈통'을 뜻하는 '까스타'에서 유래한 것이며, 인도의 전통적인 신분을 설명하는 올바른 용어라 할 수 없다.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사회 체계를 바르나와 자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 바르나 varna 는 산스크리트어로 '색깔', '계급', '유형'을 의미한다. 이 당시 크샤트리아(아리아인 이란계 백인, 귀족 및 무사 계급), 바이샤(드라비다인과 유색 원주민, 일반 평민)로 구분하였다. 자띠 jati 는 산스크리트어로 '기능', '직업적 분류'를 의미한다. 이후에 바르나에서 자띠 개념으로 카스트 제도의 유형이 세분화된다.
기원전 10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인더스강 지역에서 점점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지금의 갠지스강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밀림을 제거하고 대규모의 벼 경작을 하면서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며, 이때부터 인도 대육에 크고 작은 수많은 왕국들이 생겨났다.
기원전 6세기경 16개의 도시국가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국왕의 권위가 강화되고, 국왕 즉위식이나 전쟁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했고 탄생과 죽음, 성인식, 결혼식 등 일상에 제사 의식이 자리 잡아 경제적 이익 또한 얻으면서, 제사 의식을 크고 복잡하게 만들면서 브라만교의 힘이 강력해졌다.
사제계습이 귀족보다 높은 브라만 계급이 되었고, 정복당한 드라비다인을 포함한 천민, 노예 계급인 수드라 계급이 생겨났다. 이렇게 인도의 카스트는 넥으로 나누어져 그 누구도 자신의 계급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며, 다른 계급과 결혼은 물론 섞여 살지도 못하는 엄격한 차별 사회를 이루었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변형되고 완화된 형태로 그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지역도 있다.
브라만교는 특정한 신을 믿는다기보다는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며 아리아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나 철학과 제사 등을 가르치는 지침서와도 같은 종교였다.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제사나 종교행사는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계급만이 주최할 수 있었다.
브라만교의 엄격한 계율들은 전부 베다 경전에 기록해서 신성시하였다. 브라만 중심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기원전 7세기경 일부 개혁적인 브라만들 사이에서 '우파니샤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엄격한 제사 의식이 우주 만물의 질서를 구현한다는 브라만교의 교리를 거부하고 모든 이의 마음속에 진리가 있으니, 누구든 명상과 사색 등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자신들의 도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정복지역이 계속 확대되고 피지배층이 늘어남에 따라서 엄격하고 불공평한 카스트 제도와 브라만교에 반발하는 바이샤, 수드라, 찬달라 같은 피지배층의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기원전 5세기경 평등을 외치면서 나타난 종교가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이다.
불교는 네팔 근처 작은 나라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창시하였다. 성안에서 풍요롭게 살던 그는 성 밖에 나갔다가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극단적인 고행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긴 명상 끝에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로써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전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자비로써 대해야 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대중들에게 크게 사랑받으면서 서서히 퍼져나가게 된다.
자이나교는 바르다마나가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위대한 자, 즉 마하비라로 불리면서 탄생하였다. 인간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통을 견디는 것, 윤리를 실천하는 삶, 살생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땅속의 벌레를 해칠까 봐 농사를 짓지 않고 상업에만 종사하며, 채식 위주의 생활을 한다. 자이나교는 금욕을 강조하고, 고행을 통한 해탈을 주장하며 수행하여 그 수행이 고통스러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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